국내(중부지방)여행

경기도 일원 나들이

정병산 2010. 8. 3. 09:15

경기도 일원 돌아보기

기간: 2010. 7. 30 ~ 8. 2 (3박 4일)

지인의 사위가 휴가간 틈을 이용 우리는 그 빈집을 숙소로 정하고, 경기도 일원을 돌기 위해 춘천 의암호로~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단양 휴게소에서 잠깐 쉬고...

 

의암호에 도착하여 안내판을 사진으로 담고

 

춘천 의암호

 

춘천 의암호에서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

 

여기서 아직 해가 중천에 있어 남이섬으로 go~ 춘천 의암호를 관람하고 남이섬으로.. 지금 시간이 오후 2시 반, 휴가기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남이섬으로 가는 선착장

 

배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미나라 공화국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배를 타고 담은 사진

 

배에 승선하고 있는 일행

 

남이섬 선착장이 점점 가까워지고

 

남이섬 내

 

남이섬 내
남이섬 관객들에게 환영인사 간판

 

처음으로 와본 곳이라 여러곳을 다녀보고

 

역발상 나무래요

 

 

나미나라에서

 

배용준과 최지우가 열연한 "겨울연가"가 여기서 촬영했다네요

 

놀랜 이미지

 

나미나라에서 어느 여성이 촬영을 하고

 

배용준과 최지우 겨울연가  주인공

 

이렇게 익살스러운 모형을 만들어 유리박스 속에 넣어 두고...

 

이렇게 큰 칠면조 앞에서 사람과 싸움면 사람이 져겠는데..

 

남이섬에서 나와 다음에 찾은 곳이 청평호수.

 

청평호수에서 더위를 피해 보트놀이하는 광관객

 

 

서울 사람들이 여름에 그렇게도 좋아하던 청평호, 우리 일행들이 수상스키를 타는 곳에서 청평호수에 수상스키 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도 나이만 좀 젊었더라면 한번 시도해 보련만~

 

보트를 타는 선착장

 

호수 위에 식당 및 사무실

 

오늘은 여기까지 둘러보고 숙소가 있는 일산으로~

 

 

 

어제 청평호수를 마지막으로 일산에서 하루 숙식하고 첫 번째 찾은 곳이 서울 종묘. 종묘는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인데, 동아시아의 유교적 왕실 제례 건축으로서,

 

 

 

공간계획 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보존 상태가 우수하고, 14C 말에 창건되어 유지돼 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C 초에 중건하였고,

 

종묘 안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해인사 장경판전,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펌글)

 

정전이란 종묘의 중심부분으로 길게 지은 정전의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남쪽 신문으로 혼령이, 동문으로 임금을 비릇한 제관들이, 서문으로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들이 출입했다. 1395년에 신실 7칸의 규모로 창건했고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는 19칸에 이르러 매우 긴 건물이 되었다. 몸체인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들을 마련했다.

 

이 건물이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정전"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바로 짓기 시작하여 1935년 경복궁보다 먼저 완공했다.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한다"는 고대 중국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인 왼쪽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당의 오른쪽

그 후 왕조가 이어져 봉안해야 할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 건물의 규모가 커져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옮겨 모신다 정전에는 공적이 뛰어난 임금들을 모셨고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종을 비릇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종묘제례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서 정전에서 일년에 5번 영녕전에는 1년이 두번 열렸으면 왕이 친히 주관했다.

 

종묘제례에는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참여했으며 음악 노래 춤이 일체화한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종묘내 설명한 것을 옮김>

 

 

 

월남 이상재 선생 상

 

 

다음에 찾은 곳이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이 살며 나라를 다스리던 궁궐의 하나이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있으며,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후원인 비원까지 합해서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중요 문화재이다. 

 

태종 초에 별궁으로 지었는데 계속하여 궐내에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선정전 · 소덕전 등 여러 전각과 돈화문을 세워 본궁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 다른 궁과 함께 거의 불타 버리고 말았다.

 

1608년에 왕이 된 광해군은 1615년에 불타 버린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다시 지어 여기에 머물렀다. 이 때부터 1868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창덕궁은 정궁 구실을 하였다.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궁도 인조 반정과 몇 차례의 화재로 헐고 다시 짓는 등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위의 전각, 그리고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낙선재 등 중요한 전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비원은 우리 나라의 유일한 궁궐 후원이라는 점과 우리 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1912년부터는 후원인 비원과 함께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광복 후에는 창덕궁과 후원을 공개하고 있다. <학습그림백과에서>

 

 

 

 

 

 

 

 

 

 

 

 

장영실이 만들었다는 해시계

 

 

 

 

 

 

 

 

다음에 찾은 곳이 청계천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방치되어 있던 청계천은 1925년부터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이후 1955년 광통교 상류를 시작으로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또다시 복개되었다.

 

 

1960~70년대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청계천은 자연환경과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복원 구간은 태평로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공사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약 3,900억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청계천 복원으로 청계천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백과사전에서>

 

 

 

창덕궁에서 카메라 샷다를 너무 눌러서 건전지가 소진돼서 여기까지 담고, 아래 그림은 우리 일행이 담은 사진.

 

 

 

 

 

 

어느 숙녀가 용감하게 징금다리를 건너고 있네요.ㅎㅎ 

 

분수도 이렇게 힘차게 솟아오르고

 

청계천에서 이렇게 기념으로 인증샷을 눌렀네요

 

 

 

 

 

청계천을 뒤로하고 다음 찾은곳이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행주산성에...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이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물고기 뼈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한강 북안에 독립된 산괴로 솟은 해발 124.8m의 덕양산(德陽山) 산봉과 그 지맥을 따라 계곡을 두른 토축산성으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성이 존재하였다고 믿어지고 있다.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 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포용하고 있으며, 동남쪽으로 창릉천(昌陵川)이 유적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어 자연적인 해자를 이룬 것은 삼국시대의 산성 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은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으로 추측되며, 특히 나당 전쟁(羅唐戰爭)때까지 남북 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일 뿐이며, 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성벽은 내서의 경우 정상부를 깍아 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 능선을 이용하여 성의 내부 쪽에 간단한 석축 기초를 두고 기초 부분의 너비가 약 6.6m ∼ 8m이고 5∼10cm의 두께로 점토와 마사토를 교대로 판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의 흔적이 희미하게 계곡을 이룬 산 중턱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이른바 이중식 산성은 삼국시대 이래의 수개축의 결과인 듯하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기의 유물들이 많이 보이고, 어골문(魚骨文)의 기와편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 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산성은 1593년(선조(宣祖) 26) 권율(權慄)의 전적지로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의 글은 백과사전에서>

 

 

 

 

오늘은 행주산성으로 마지막으로 숙소에 들어가다.

 

 

임진각은 2부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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