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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일원 나들이 1부(청령포, 선암마을, 장릉, 김삿갓마을, 강릉경찰수련원, 주전골, 용소폭포, 성국사, 미시령, 낙산사, 의상대, 해수관음상, 홍련암, 휴휴암, 오죽헌)

정병산 2021. 1. 14. 18:06

서해안 나들이 일괄 포스팅하고 나니, 강원도 일원에 다녀온 것이 생각나 이것도 포스팅할까 한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2008. 10. 15~10. 18) 강원도 강릉 경찰수련원 2일, 경북 백암 LG연수원에 2일, 숙박할 장소를 예약해놓고 4박 5일 동안 나들이에 나서다. 

 

현풍 휴게소에서 쉬고

 

다음은 단양휴게소에서 또 쉬고

지금이야 밀양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탈 수 있지만 그땐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대구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진입해 가다가 제천 나들목에서 나와 38번 국도로 가다 첫 번째 들린 곳이 강원 영월 청령포 단종의 유배지를 찾아보다.

 

단종은 조선시대 6대 왕으로 세종대왕 원 세손으로 문종의 왕세자로 10세에 책봉되었다. 문종이 2년 뒤에 승하하고 12세에 어린 나이에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때 단종 복위운동을 하려다 실패한 사육신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청령포는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마치 섬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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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은 살아서 절개를 지킨 조정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묻힌 생육신이다. 사육신 사건 이후 단종은 1455년 창덕궁을 출발하여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 후에 2년 뒤에 결국 한명회, 세조로부터 강요당해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어린나이에 관풍헌에서 승하하였다. 역사적으로 아는 사실이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읊어본다.

 

단종의 시녀가 다딤질을...

 

단종이 정좌하고 있는 모습

 

 단종에게 무얼 고하는지?

 

시녀는 분주하게 일을 하고

 

단종의 넋을 기린 사당

 

어제시가 벽에 걸려있고

 

단종의 어소

 

노산대와 가까운 곳에 '망향탑'이라는 돌탑이 있는데,  이 돌탑은 단종이 한양에 있는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며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망향탑 때문인지 청령포 곳곳에서 방문객이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을 볼 수 있고요.

 

관음송

 

단종이 갈라진 소나무 가지 사이에 앉아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는 영월의 관음송

 

"이강"이 이렇게 흐르고

 

 

 

청령포에서 나와 이렇게 인증샷을

 

다음은 국도 38선 왔던 길을 34km나 되돌아가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는 곳(선암마을)을 찾아서 가다

 

한반도지형과 같은 곳

 

 

여기서 또 인증샷

 

다음은 단종의 묘가 있는 장릉을 찾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33-1로 가다

 

장릉의 유래

제6대 단종대왕의 능이다. 세조3년 6월 집현전 학사 성상문, 박팽년 등이 상왕복위 사건으로 참형을 당한 6월 21일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었고, 그 다음날 영월 청령포로 유배 되었으며, 그곳에서 2개월 남짓 기거하시던 중 홍수로 인하여 관풍헌으로 옮겨셨다. 세조 3년 여섯째 삼촌 금성대군의 단종의 복위 계댁이 발각되자 노산군은 폐서인이 되었고 그해 10월 24일 사사되었는데, 그때 춘추 17세였다. 단종의 유해가 동강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홍도가 "옮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옥체를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을 하였다. 중종 11년 노산묘를 찾으라는 왕명이 있었고, 중종 31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의 현몽에 따라 노산묘를 찾아 수축봉제 하였다. 숙종 24년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으로 하고 묘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지 241년만에 왕실의 정례를 되찾게 되었다. 신록의 근거 <위 입간판에서>

 

여기가 장릉, 주위에 있는 소나무가 전부 정릉을 향해 고개를 숙여 있는 걸 봐 사진을 담았는데 어디로 갔는지?

 

 

단종역사관

다음은 장릉을 뒤로하고 풍류시인 김삿갓 유적지를 찾아서~

 

대부분 사람들은 김삿갓 이름은 많이 들어도 김삿갓 마을이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을 것인데요, 한번 찾아보면 그런대로 볼만한 볼거리가 많아요.

 

김삿갓 마을로 찾아 가는 길

 

여기가 김삿갓 마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김삿갓이 왜 삿갓을 썼는지 알고나 갑시다.

김삿갓 (1807~1863)의 본명은 김병헌이다. 5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그 당시 선천부사였던 그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군에 항복하여 이듬해 난이 평정된 후 김익순은 처형당하였으니

 

그의 집안은 풍지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영월군 와석리 깊은 산중에 숨어살게 된다. 김병헌이 20세 되던해에 영윌 동현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있던 그는 김익순의 죄상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하게 된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게 되어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과 조부를 비판한 시를 지어 급제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하늘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던 그는 어머니, 아내, 자식을 뒤로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한다. 4살 때 천자문을 땠다고하니 머리하나는 좋았다고~

 

난고 김삿갓 문학관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채 많은 시를 남기고 정처없이 방랑하던 그는 57세에 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여 차남이 이곳 와석리 노루목에 모셨다 한다. 

 

 

 

 

 

 

 

    김삿갓 묘가 있는 곳

 

 

 

오늘은 여기를 마지막으로 해가 저물어 숙소인 강릉 경찰수련원으로~

 

강릉 경찰수련원

수련원에서 하루를 쉬고 다음 찾아갈 곳은 설악산 주전골-용소폭포-성국사-오색약수-한계령-미시령 등

 

우리들은 위에서 하차시키고 차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 우리는 아래로 장유와 봉곡은 아래에서 위로 서로 도킹을 기다리며~

 

이런 기암괴석도 보이고

 

용소폭포

 물이 하도 맑아 선녀가 몰래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용소폭포

 

 

길은 이렇게 잘 만들어 놓았고

 

 

 

 

계곡에서 산봉우리들을 보면 그 모양새가 중국의 장가계와 겨눌만하고요.

 

얼마나 좋길래 정신없이 보고~

 

 

장가계와 비슷하지 않나요

 

여기가 성국사
성국사 경내 
오색약수가 점점 가까와 오고

 

오색약수까지 내려 와서, 철분이 많아 녹물 같은 빛을 띄네요

 

 

 

 

여기는 설악산 특산물 판매소가 보이고

 

한계령을 지나

이렇게 해서 한계령과 미시령을 다 돌아봤으니 강원도 구석구석을 보게 되네요.

 

 

한계령 정상에서 주차된 관광객들의 차량

 

미시령까지 왔으니

 

 

미시령 휴게소

 

 

 우리들은 미시령쪽으로 우회전

 

 

 

다음은 낙산사를 찾아서

 

멀리 보이는 의상대

 

    의상대

양양군 북쪽 해안에 위치한 낙산사(洛山寺)는 오봉산(五峰山)을 배경으로 하여 신라고승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지은 절이다. 의상이 하루는 바닷가 동굴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몸소 친견을 하고자 이곳을 찾아왔다. 바닷가 바위 절벽 위에서 여러 날 기도한 의상애용으로부터 여의주를 받고 관음보살로부터 수정 염주를 받은 후 이를 안치한 곳이 낙산사다. 

 

의상기념관과 다래현

훗날 의상대사가 수도한 절벽 위에 정자를 세워 의상대라 불렀고,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절을 지어 홍련암이라 했다. 이곳은 오늘날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로서 불교신도들이 많이 참배하고 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자료가 전시되고 있는 의상기념관

 

참고로 4대관 음성지는 ①낙산사 홍련암 ②강화도 석모도 보문사 ③남해군 금산 보리암 ③통천군 금란굴이다. 1977년에 오봉산 자락 신선봉 정상에 동양 최대 해수관음보살을 세웠다. 낙산 주위의 경관을 다시 여덟곳으로 나누어 낙산팔경이 전해오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원통보전

 

 

 

 

2006년 양양 낙산사 인근 산불로 일부가 소실돼 이렇게 새로 짓는 것도 보이고

 

 

해수관음상

 

해수관음상 아래 홍련암

 

다음은 양양 휴휴암으로

 

영동 고속도로를 쭉 타고 강릉까지 가다가 속초방향으로 동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현남 IC에서 속초방향으로 약 5km 정도 가다 남애항을 지나면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광진리 7번 국도 옆에 위치한 동해의 숨겨진 비경이라 할만한 지은지 10년 된 휴휴암이 나온다. 

 

양양 휴휴암

휴휴암 뒤쪽으로 바다쪽을 내려다 보면 바다속에 거북이의 형상을 한 넓은 바위가 평상처럼 펼쳐져 있다. 마치 부처가 누워있는 듯한 형상의 자연적으로 생성된 바위가 있으며, 거북형상의 바위가 마치 부처를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듯 신비한 형상을 띄고 있다.

 

휴휴암 종각

그리고 부처상 오른쪽 절벽 위에는 중바위라고 불리는 큰 바위 두개가 나란히 있는데, 목탁을 든 채 아래의 부처상을 향하여 합장하며 절을 하고 있는 스님의 형상을 띄고있어 더욱더 경이롭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휴휴암에서 바라본 바닷가

 

쉬고 또 쉰다는 휴휴암

 

 

 

내려왔던 길을 되돌아 강릉 오죽헌으로~

 

 

오죽헌은 1950년 무렵 지워진 건물로 1505년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이 둘 째딸의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주었다. 이사온은 외동딸을 서울의 신명화와 혼인시켜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그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는 강릉의 친정어머니 최씨가 병이 나자 간호를 위해 강릉에 머물고 있을 때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을 낳았다.

 

또한 신사임당도 서울의 이원수와 혼인하였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강릉에서 지내다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비록 시집은 갔지만  친정 부모를 보살피려는 "효"때문에 신사임당과 율곡이 오죽헌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신사임당의 어머니가 넷 째딸의 아들 권치균에게 현재의 오죽헌을 물려 주었는데 '오죽헌'은 집 주위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많아 권치균이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지은데서 비릇 되었다. 경내에는 몽룡실, 문성사, 어제각, 율곡기념관, 바깥채, 안채 및 시립박물관이 있다. <자료: 강릉시청>

 

안채

 

율곡선생과 신사임당이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오늘날 오죽헌을 지키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다.  수령이 600년이 넘는다고~

 

 

문성사

문성은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안에서 본 안채

 

율곡전서

 

율곡선생 행장기

 

 

 

시립박물관

 

오죽헌을 마지막으로 해가 저물어 강릉 숙소로 가다. 다음은 오대산 소금강을 포스팅 해야하는데, 이 블로그에서는 사진올리는 것이 50장으로 한정돼 있어서~ "2부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