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2007. 10. 10∼10. 12(2박 3일)
2007년 시월 중순 LG연수원에 숙소를 잡아두고 경북 일원에 나들이에 들어가다. 창원에서 출발하여 경주를 경유 동해안 해안길을 따라 삼사 해상공원, 강구 해맞이공원, 풍력발전 단지, 후포항, 즉 백암을 기점으로 그 주위를 돌아보다. 그밖에 원덕 해신당공원, 불영사 계곡, 고추의 고장 영양, 안동 하회마을을 둘러보다.
여름이 지나 해수욕장엔 사람들이 없지만 백사장이 넓고 동해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해상공원도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수 없는 곳이라 동해안을 여행하다 보면 이런 아름다운 해상공원도 접하게 되고..
이렇게 큰 화문석은 처음 보게 되고
경북대종기념비 이 경북대종은 경상북도가 개도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의근 경상북도 지사의 발의로 포항종합제절주식회사의 협찬을 받아 건립하였다네요.
영덕하면 대게, 태진아 동생이 형 이름 팔아 장사하기 위해 쓰붙인 간판이라 해야하나?
등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드넓은 잔디언덕은 산불로 황폐해진 민둥산을 1998년에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해서 2002년에 완공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산책로를 만들었다네요.
깨끗한 바다물이 바위를 부딪치는 하얀 파도 정말 장관입니다.
백암온천에 숙소를 잡아둔 LG연수원
여기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에 찾은 곳이 관동팔경 중 하나인 월송정.
울진 후포항에서 10분거리에 있는 바다 앞 솔밭에 자리하고 있는 멋진 정자가 하나 있는데. 신라시대 화랑들이 이곳에서 선유를 즐겼던 곳이라고.. 풍유를 아는 선비들이 택한 정자여서 인지, 울창하고 멋스러운 솔밭과 월송정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 가히 일품이라 할수 있지요.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월송정은 고려시대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찾든 곳으로써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정자이다. 중도에 퇴락한 것을 조선 연산군 때에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지만 다시 황폐해져서 1933년에 이 고을 사람 黃萬永.全子文등이 재차 중건하였고,
일제말기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점거되어 터만 남아 있었다. 그 후1969년에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 후원으로 2층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졌으나 원래의 모습과 너무 달라 해체하고 1980년에 현재와 같이 다시 세웠다.
이 정자는 四仙이라고 불린 신라시대 영랑, 술랑, 남석, 안상등 내화랑이 유람했다는 설화가 남아 있는 유서깊은 곳으로 만 그루의 소나무가 십리가 넘는 흰 모래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월송이라는 이름은 四仙이 달밤에 송림에서 놀았던 데서 유래되었다 하고, 월국에서 솔씨를 가져다 심었기 때문이라는 鄕傳도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다음에 찾은 곳이 해신당 공원~
백암 온천에서 하루를 보내고 남근을 만들어 전시한 삼척시 원덕읍 삼척로 1852-6에 자리 잡은 해신당 공원을 찾아가다.
해신당의 전설
옛날 이 마을에 장래를 약속한 처녀 애랑이와 총각 덕배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애랑이가 미역을 따러 갔다가 풍랑을 맞아 죽었다, 그 후 이 바다에 고기가 잡히지 않고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마을 주민들은 재앙 모두가 애랑이의 영혼이라 생각하고 바위섬에 고사를 지냈으나 고기는 잡히지 않고,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부가 바다를 향해 소변을 보고 난 후 다른 어부들은 빈 배인데, 그 어부는 만선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듣고 다른 어부들도 바다에 오줌을 누고 난 후 만선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이 마을 사람들은 애바위가 보이는 산 끝 자락에 애랑이를 모시고 남근을 깎아 혼인을 못한 원한을 풀어주었다 한다.
다음날 찾은 곳이 불영사 계곡
불영사 사찰이 있는 곳까지 가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했다.
불영사 계곡은 울진군 하원면에서 근남면 행곡리까지 15km에 걸쳐 있는 이 계곡은 곳곳에 기암괴석과 맑은 물 그리고 울창한 숲이 어울러져 경관이 빼어난 명승지이다. 이 곳은 계곡과 주변이 조화를 이루어 계절별로 색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전망이 좋은 중간지점에 탐방객의 편의를 위해 선유정과 불영정이 세워져 있으며 군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울진에서 봉화로 가는 36번 국도변에 위치한 이 계곡의 한자락에 유서 깊은 불영사가 자리하고 있다. <위 표지판에서 옮긴글>
구주령(九珠嶺)은 경북 영양군 수비면과 울진군 온정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약 550m의 고개다. 국도 제88호선(영양~울진)이 통과하며 고개 서쪽 도로는 완만한 본신계곡을 따라 올라가 경사가 완만하고(최대경사 8%) 커브가 거의 없는 반면 고개 동쪽 도로는 평지에서 능선 쪽으로 바로 올라가 최대경사가 10%에 달하고 커브가 심하다. 고개 정상 근처에는 구주령 휴게소와 구주령 비석이 있다.
또 고개 정상에는 금장산으로 연결된 등산로와 "옥녀당"이 있는데 여기에는 전설이 얽혀 있다.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인조 때 영해부사로 근무하던 황(黃)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옥녀라는 딸이 있었다. 당시 영양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을 갖지 못하고 영해부에 편속되어 있었는데, 옥녀는 아버지의 명으로 영양 관아(수비)에 중요한 공문서를 전달하러 왔다가 영해로 돌아가는 길에 이 구주령에서 갑자기 병이 들어 나졸들이 급히 구급약으로 치료를 하였으나
하루만에 객사(客死)하고 말았다. 이에 주민들이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 죽은 옥녀의 넋을 위로하고 공을 기리기 위해 옥녀가 죽은 이 고개에 모덤을 만들고 사당을 세웠으며, 매년 음력 정월 보름달에 동제(洞祭)를 지내왔다. 옥녀의 무덤에 벌초를 하면 득남(得男)하거나 작은 소원 하나가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와 득남을 원하는 부인들이 몰래 와서 벌초를 하였으며,
무덤이 길목에 있어 고개를 넘는 나그네와 지역 주민들의 정성스러운 관리로 묘의 보존이 잘 되었다. 옥녀 사당은 1995년 수비~온정간 도로 공사시 시멘트 건물로 이전 개축되었으나 민속자료로서의 원형복구를 염원(念願)하는 지역 주민들의 건의에 의하여 현재의 건물로 복구되었으며, 2002년 5월 옥녀 무덤에 묘비석을 세우고 주변에 조경공사를 실시하였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구주령 고개를 넘어 여기는 고추의 고장 영양이고요
마침 여기서 영양군 농업인 한마음 대회가 있었다.
다음은 영양 분재수석 야생화 전시관, 여기서 분재를 약 50여 종을 사진을 담았으나 대표적으로 하나만 올린다.
다음 찾은 곳이 하회마을
이 마을은 풍산류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전형적인 동성마을로서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사대부집으로부터 가랍집(서민집) 등 고건축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이 곳은 조선시대의 대유학자인 겸함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회는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다리미형 등의 길지로 알려져 있으며 낙동강이 동쪽으로 흐러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감싸 돌고 있어서 지명도 하회가 되었다. 그리고 동쪽의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이 있고 그 줄기의 끝이 강에 싸인 마을까지 뻗어서 아주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게시판에 표기돼 있는 걸 보고>
안동 하회 마을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민속 마을이다.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며 물돌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마을주민의 70%가 류씨이다. 풍산 류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약 600여 년 전으로 류씨가 터를 잡기 전에는 허씨와 안씨가 먼저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구전으로는 하회탈의 제작자가 고려 중엽의 허도령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며, 하회마을에서 강 건너 광덕동에는 허정승의 묘가 있어 해마다 류씨 가문에서 벌초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이를 빗댄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 류씨 배판"이라는 속언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주민들을 내몰게된데는 안씨집안의 딸 하나가 류씨집안으로 출가를 하면서 안씨 집안의 기운이 외손인 류씨들한테 이어져 씨족의 터전을 빼았기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하회마을은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2005년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방문지로 국제적인 매스컴에 오르기도 했던 마을이다. 서애 류성룡의 임진왜란 회고기인 "징비록"과 하회탈 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물이 4점, 중요민속자료가 10점, 사적 1곳 등이 있고, 1984년에는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이 되었다. 하회탈춤으로 이름이 알려진 별신굿 탈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로 서낭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행하던 탈놀이다.
국내 탈춤중 가장 오래 되었고, 1928년 일본 감점기때 강제로 중지 되었다가 이후 다시 복원 되었다. 놀이마당은 무동마당, 주지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양반과 선비마당, 혼례마당, 신방마당의 여덟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보 121호인 하회탈은 지금은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9개의 탈만 전해지며, 이 중 3개의 탈은 분실되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안동 양진당
이 건물은 겸암 류운룡이 살던 집으로 풍산 류씨의 대종가이다. 1500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회 북촌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안채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후에 지었다 한다. 이 건물은 "ㅁ"자 형의 안채와 "ㅡ"자 형의 사랑채, 그리고 "ㅡ"자 형의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 표지판 보고 옮긴 글>
사랑채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이다. 높은 축대 위에 건물을 세우고 주위에 난간을 둘러 마치 누각과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사랑채의 앞에는 넓은 사당마당을 사이에 두고 "ㅡ"자 형 행랑채가 있는데 출입문의 역할을 한다. 안채는 큰 안방과 안대청이 있으며 사랑채와 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뒤에는 2개의 사당이 있다.
여기를 마지막으로 백암온천에서의 나들이를 마무리하다.